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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성간 결혼"에 대하여

동성간 결혼에 대한 토론

우리는 저번 시간에 자기 자신의 이야기 체에 대한 개념을 이야기를 하면서 끝났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체의 개념을 테스트해 보았으며 그리고 동의로부터 나오지 않는 어떠한 계약이나 합의 또는 우리가 만들었을 만한 선택이 없는 것과 관련되어 주장된 충성, 회원 자격에 대한 의무에 대해서도 이야기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우리 사이에서 이러한 의무가 있는지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습니다. 아니면 모든 충성과 회원 자격에 대한 의무는 동의 또는 상부상조 아니면 개인마다 존중해야 할 보편적인 법칙으로 번역되는지에 대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여기에 있는 사람들 중 충성과 애국심을 변호를 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충성, 결속, 그리고 회원 자격에 대한 아이디어는 우리의 토론에서 어떠한 직관에 의한 도덕적인 힘으로 모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결론을 내렸는데요, 우리가 생각하기로는 이 아이디어에 대해 아주 구체적인 예라고 여긴 것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1950년대 그 인종 차별을 하는 남부지역 사람에 관한 동영상에서는 그들은 그들의 전통, 역사, 정체성에 대하여 자기와 연관된 모든 역사적 삶에 대해 모두 말하였습니다. 여러분들은 그것이 기억나십니까? 그리고 무엇이 그 역사로부터 나왔을까요? 이야기 체의 자기 정체성 그리고 그러한 남부지역 인종 차별 자들에 대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삶의 방법에 대하여 방어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것이 과연 자기 자신에 대한 이야기 체의 개념의 아이디어에 대하여 대단히 중요한 또는 결정적인 반대 이의가 되는 것입니까? 이 질문이 우리가 남겨놓았던 것이었습니다.

오늘 제가 하고 싶은 것은 이 논쟁을 진보시키고 여러분들이 어떻게 생각하는 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제가 이 논쟁이 무엇인지에 대해 말해드리도록 하죠. 저는 자발적인 것과는 반대인 사람의 이야기 체의 개념을 변호하고 싶습니다. 저는 충성 또는 회원 자격의 의무가 있다는 아이디어를 변호하고 싶습니다. 그 후 저는 우리가 정의로 갔을 때 정의에 대한 논쟁이 있었는데 그것들은 좋은 것에 대한 질문에 결코 분리되지 못한다는 아이디어에 대해 그러한 의무들이 있다는 것을 제안을 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저는 구분할 수 있는 두 가지의 다른 방법이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는 정의가 좋은 것과 연관이 될 수도 있다는 것에 관련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중 하나에 대하여 논쟁할 것입니다. 칸트와 롤즈가 말한 사람에 자발적인 개념에 대해서 우리는 강하고 자유롭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것은 더욱이 보편적인 것에 호소하는 것입니다. 편견이 없이, 차별이 없이 사람을 사람처럼 대하는 이 아이디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 중 몇 명을 회원 자격에 대한 의무가 있을 수 있다고 인정은 하지만 항상 그것들은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으로서의 의무, 즉 보편적인 의무보다 하위에 있어야 한다는 논쟁하도록 하게 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요? 만약 충성을 포위하기 위해서 항상 충성이 다른 특별한 것들보다 더 우위에 있어야 하나요? 그렇게 된다면 친구와 낯선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이상적으로 극복되어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가 우리 친구들에 대한 특별한 걱정은 인류의 보편적인 걱정과 우리의 거리를 재어 본다면 이것은 편견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여러분들이 이 아이디어를 자세히 잘 들여다 본다면, 우리는 어떠한 도덕적인 세상, 어떠한 도덕적인 상상의 세상으로 데려갈까요?

5:00 계몽 운동의 철학가 몬테스키는 가장 강한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로는 이 냉혹한 일반화하는 경향이 있는 최후로 가장 정직한 것이 도덕적 상상으로 데려갑니다. 이것이 몬테스큐가 말하였습니다. “진실로 덕이 있는 사람은 가장 먼 낯선 사람에게 자기의 친구처럼 최대한 빨리 도움을 주기 위해 갈 것입이다.” 그리고 그는 덧붙입니다. 이것에 대해서 들어보세요. “만약 사람들이 완벽하게 덕이 있다면 그들은 친구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세상을 상상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그것은 만약 사람들이 덕이 있고 그들이 친구들이 없다면 단지 보편적인 성향이 친절로 되는 것입니다. 단순히 그러한 세상을 오게 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 문제가 아닙니다. 이것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지요. 더 깊은 문제는 그러한 세상은 인간의 세상이라고 인지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인류에 대한 사랑은 고결한 감정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에는 우리는 우리의 삶을 더 작은 결속 속에서 살아갑니다. 이것은 도덕적인 동정대한 묶는 유대의 특정한 한계가 있다는 것을 반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하게 그것은 우리가 보편적으로가 아니라 특정한 표현을 통하여 인류를 사랑하게 되는 것을 배워가고 그 사실을 반영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몇 개의 고려해야 할 사항들입니다. 이것들은 때려눕혀야 하는 주장들이 아닙니다. 하지만 도덕의 철학은 우리가 여태까지 토론하고 논쟁을 하였던 것들에 대하여 때려눕혀야 하는 주장들을 제공하지는 못하나 고려를 할 수 있게 제공할 수 있습니다. 의무에 대하여 사람이 옳다는 것으로 이미지를 만드는 평가를 하는 하나의 방법이 맞는다고 합시다. 정의의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보기 위해서요. 그리고 여기서 가장 중대한 문제를 맞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전의 봤던 남부지역에 사는 인종 차별 자로 돌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들은 역사의 중요성을 느꼈고 우리는 그들의 특성을 흠모합니까? 그들의 삶에 대한 방법을 보존하고 싶어하는 이러한 차별 자들에 대해서요? 우리는 과연 만약에 결속과 회원 자격에 대한 아이디어를 받아드린다는 것은 우리가 정의가 좋은 것에 묶여 있다는 것 그리고 정의가 뜻하는 것은 어떠한 공동체나 전통, 그 인종 차별 자들을 포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에 헌신적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요?

이것이 두 가지의 다른 방법을 구별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의 이유가 나옵니다. 정의가 좋은 것과 묶여 있다는 것 말입니다. 그 중 하나는 상대적으로 설득이 가능한 것인데 이 방법은 권리에 대해 생각해보면, 정의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면 어떠한 공동체나 어떠한 시간에나 우세하고 있는 가치를 보면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들을 어떠한 외부적인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고 대신해서 정의가 그들이 함께 나눈 특정한 전통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충실하다고 마음에 품으면 됩니다. 하지만 이렇게 정의를 좋은 것에 묶는 방법에 대해서는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 문제는 그 정의가 신성한 관례로 만들어지는 것인가요? 상황으로부터 만들어진 제품이요. 이것은 정의의 특별한 특징을 박탈하게 됩니다. 하지만 정의가 좋은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던지 묶이던 지에 대하여 두 번째의 방법이 있습니다. 이 두 번째 방법은 적어도 정의를 좋은 것에 묶는 것에 대한 상대적이지 않은 방법에 대해서 입니다. 정의의 원리는 그 정당화에 의해 좌우됩니다. 어떠한 곳에 일정한 시간에 우세하게 되는 가치가 아니라 대신 도덕적인 가치가 있는 또는 본질적인 좋은 존재 이유, 권리 그리고 섬기는 것들 입니다. 이 상대적이지 않은 방법은 옳은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케이스에 대한 것은 그것이 인류에 어떠한 좋은 점에 대해 명예롭게 여기고 증진시키게 보여지는 것에 의하여 좌우됩니다. 정의를 좋은 것에 묶어놓는 두 번째 방법은 정확히 말해서는 공산사회주의가 아닙니다. 여기서 뜻하는 이 공산사회주의의 의미는 단순히 정의의 정의를 어떤 특정한 공동체에 맡겨놓는 것입니다. 만약 정의와 옳은 것을 연결하는 이 두 가지의 다른 방법에 대하여 제가 제안하고 싶은 것은 첫 번째 것은 불충분합니다. 왜냐하면 첫 번째 것은 정의를 관례의 창조물로 놓아두기 때문입니다.

10:00 이것은 우리에게 남부지역에 사는 자신들의 삶의 방식과 전통 그리고 그들이 어떤 것을 하는 방식에 대해 호소하는 그 인종 차별 자에게 반응할 수 있는 도덕적인 요소가 충분히 주어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만약 정의가 좋은 것과 상대적으로 연관되어 있지 않는다면 여기에는 아주 큰 도전이 생기게 됩니다. 풀어야 할 아주 큰 질문이 생깁니다. 우리는 어떻게 좋은 것에 대한 이유를 알 수 있습니까? 그리고 사람들은 좋은 것에 대한 다른 개념을 갖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합니까? 핵심 되는 사회적 공공단체의 목적에 대한 다른 아이디어를 갖고 있는 것 말입니다. 인류의 좋은 것들 중 명예롭게 여기고 인정을 해야 할 사회적으로 좋은 것의 아이디어에 대해서는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여러 직업을 겸한 사람들이 있는 사회에 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좋은 것이 무엇이냐에 대하여 동의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정의의 원리 찾아내려고 하는 하나의 동기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정의와 권리에 대하여 어떠한 특정적인 목적 또는 좋은 것에 의존하지 않는 것으로서 말입니다. 그렇기에 좋은 것에 대하여 이유를 찾는 방법이 있습니까? 그 질문에 대하여 말하기 전에 저는 조금 쉬운 질문을 주고 싶습니다. 필요합니까? 정의에 대하여 논쟁을 할 때, 좋은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논쟁을 할 때 그것이 피하기 어려워도 필요하다는 그 질문에 대하여 저의 답변은 맞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피하기 어렵습니다 (불가피합니다). 그것은 필요해요. 그래서 오늘 남은 시간에는 저는 갖고 오고 싶은데 저는 그 질문의 발전을 시도하고 싶습니다. 좋은 것 그리고 목적 또 존재 이유에 대하여 논거를 주장 할 때 정의에 대하여 논쟁을 할 때 피하기 어려운 특성입니다. 그것은 필요합니다. 제가 이것을 성립할 수 있는지 보죠.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우리가 동성간의 결혼에 대한 논쟁을 시작하였으면 좋겠습니다. 자, 동성간의 결혼은 아주 논쟁이 크고 물의를 일으키는 아이디어에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으로 끼어있고 또는 연루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그 뜨겁고 논쟁이 큰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인 질문에 대하여 하나의 판단을 한쪽 또는 다른 쪽으로 내리기 위해서 전체의 사회가 필요하지 않다는 정의에 대한 개념 또는 권리에 대하여 포옹을 하던 지에 대한 강한 혜택이 있습니다. 동성애자에 대한 개방에 대한 능력 증가, 사회적 공공단체에서의 결혼의 적절한 이유에 대한 것입니다. 그래서 명확히 이 질문을 답변하는 것에는 혜택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권리를 정의하는 것에 대해서 사회의 전체가 그러한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인 논쟁들을 정리해야 하는 것이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아주 매력적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제가 하려고 하는 것은 동성간의 결혼 케이스를 사용하여 개인의 동성애자에 대한 개방성과 결혼의 목적 그리고 존재이유들에 대한 구분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지에 대하여 보려고 합니다. 그러한 질문들을 구분하기 위해서 사회가 동성간의 결혼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 필요한지 또는 필요하지 않는지에 대하여 말할 것입니다. 그럼 시작합시다. 저는 이렇게 시작하고 싶습니다. 먼저 동성간의 결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며 국가는 오로지 남자와 여자가 하는 결혼만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람들의 논쟁을 듣고 싶습니다. 이것을 말할 지원자가 있습니까? 저는 두 명의, 벌써 정의 블로그에 그들의 입장을 벌써 밝힌 사람들이 두 명이 있습니다. 마크 랄프씨와 라언 매캐프리씨입니다. 당신들은 어디에 있어요? 네, 마크씨? 그럼 라이언씨는 어디에 있죠? 알겠습니다. 먼저 마크씨에게 가봅시다.
A: 저는 성의 목적 그리고 결혼의 목적에 대해서는 목적론적인 이해에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생각하기로는 저와 같은 기독교이고 천주교인 사람들은 성의 목적은 결혼을 전제로 되는 것이며 생식은 그 하나의 목적이고 그리고 두 번째는 남자와 여자를 통합시키는 목적입니다.
그래서 당신은 특정한 목적이 있기에
A: 네.
인간의 성행위는 생식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요?
A: 맞습니다.
일치도 마찬가지고요? 결혼의 핵심적인 것 그리고 목적은, 사회적 공공단체에서의 결혼은 그 목적을 위한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결혼의 목적을 명예롭게 하기 위해, 다시 말해 적절한 목적을 위해서 입니다. 이것이 당신의 입장에 대한 공평한 요약이 되겠습니까?
A: 네.
라이언씨는 어디 있습니까? 말하세요. 당신은 마크씨의 이유와 더 많이 또는 더 적게 동의합니까?
B: 저는 동의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결혼의 이상적인 것은 생식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동성애자들이 가서 서로와 동거하는 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정부는 그것을 장려해야 할 의무가 없습니다.

15:02 그렇기에 정부는 결혼에 대한 인정에 대하여 의논할 때에는 동성애자 행동을 장려해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인가요?
B: 네. 그것을 금지하는 것은 옳지 않는 것이나 장려하는 것은 필요하지 않습니다.
이것에 대해 답변을 갖고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네. 한나씨.
C: 저는 그냥 마크씨한테 질문을 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여자에게 결혼을 하였다고 합시다. 그리고 당신은 결혼하기 전에 그녀와 성관계를 갖지 않았다고 합시다. 그리고 당신이 결혼한 후 당신들은 생식력이 없는 부부라는 것이 분명하다고 합시다. 그러면 당신은 아이들이 그 행위로 생기지 않는 성관계를 한다면 불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인가요?
A: 네, 저는 도덕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두 가지의 이유를 들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한 여자가, 제가 생각하기로는 늙은 한 쌍의 남녀도 결혼해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한 여자가 벌써 폐경기를 맞게 되어서 아이를 가질 수 없다면 제가 생각하기로는 성행위는 생식을 벗어나 다른 이유가 있기 때문입니다.
C: 저는 거친 것이 되기는 싫은데요, 당신은 자위를 해본 적이 있으신가요?
당신은 안 해도, 당신은 그 질문에 대하여 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알겠습니다. 잠시만요. 아닙니다. 자연적인.
A: 아닙니다. 저는 그 질문에 답하고 싶습니다.
아니요, 제가 생각하기로는. 잠시만요. 우리는 전체 학기를 잘해왔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도 잘하고 있습니다. 누구도 대학교 환경에서 논의된다고 상상할 수 없는 질문들에 대하여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한나씨, 당신은 아주 강한 지적을 갖고 있는데 그것을 좀 더 보편적인 주장으로 만드세요. 의문의 질문으로 만들지 마시고요.
C: 알겠습니다.
주장을 하세요. 당신이 말하려고 하는 원리, 당신이 갖고 있는 주장에 대해서요.
C: 네, 알겠습니다.
제3인칭을 사용해서 말하세요. 대신해……
C: 알겠습니다.
제2인칭을 사용하는 것 대신해서요. 논쟁을 주장하세요.
C: 근본적으로 자위는 허용될 수 없는 것인데 그 이유는 아이의 탄생을 위한 결과가 아닌 자기의 씨앗을 땅에 뿌리는 것은 하지만 제가 말하는 것은 당신이 말하는 것은 성행위는 그것이 생식을 위한 것 또는 혼인의 결속을 강화를 위해서 하지 않는 것이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A: 맞습니다.
C: 그렇지만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자위가 허용될 수 있는지 왜냐하면 자위는 분명히 아이를 창조하지 않을 것인 데 말입니까?
A: 네, 제 생각에는 결혼은 사회적 규정을 만들기 위해서 이라고 생각하는데 사회가 이것이 우리가 미덕으로 삼는 것이고 부족한데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로 부족합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당신이 다른 모든 사람처럼 개인적으로 어떠한 도덕적인 면이 부족하다면 당신의 논쟁을 가져가는 것은 아닙니다.
저는 당신이 거기에 있기를 바라고요, 저는 다른 이야기를 할 사람을 데리고 오고 싶고 우리는 계속 할 것입니다. 거기에 있을 수 있으면 있으세요. 말하세요.
D: 제가 생각하기로 자위에 대한 답변은
당신의 이름을 먼저 말해주세요.
D: 저는 스티브입니다.
스티브씨.
D: 알겠습니다. 자위에 대한 쟁점의 답변은 그것은 허용될 것의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어느 누고도 동성애자의 성행위가 허용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사회는 당신을 당신 자신에게 결혼을 할 시킬 곳이 없습니다. 자위는 당신이 하는 것입니다.
알겠습니다. 한나씨, 스티브씨가. 네, 그것은 아주 좋은 주장이었습니다. 스티브씨는 우리의 주목을 우리가 여기에 두 가지의 쟁점이 있다는 사실로 돌렸습니다. 그 중 하나는 가지각색의 습관에 대한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는가 입니다. 그리고 그 다른 것은 그것들의 도덕적으로 허용될 수 있다는 것과 상관없는 특정한 습관과 국가가 결혼에 대해 허용하는 또는 합의하는 것에 대한 명예 또는 인정의 사이가 적절한지에 대해서 입니다. 그래서 스티브씨는 아주 좋은 반대 주장을 하였습니다.
C: 알겠습니다.
당신은 스티브씨에게 뭐라고 할 것입니까?
C: 제 생각으로는 분명하게 인간의 성행위는 타고난 것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일어난다고 믿습니다. 이것은 당신이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자위는, 제가 말하는 것은 자기 자신과 결혼할 수는 없으나 제 생각으로는 동성애자도 사람이라는 그 사실을 가져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왜 그들이 그들끼리 결혼을 할 수 없는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자기 자신과 결혼하고 싶은 것은 제가 생각하기로는 당신이 합법적으로 그렇게 할 수 있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괜찮지만.
잠시만요, 잠시만요. 여기 우리는 정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입법자라고 생각하고 법이 어떻게 만들어 지어야 할지 심의하여야 합니다. 그럼 당신은 스티브씨에게 그것은 괜찮다고 하였습니다. 이 뜻은 당신이 입법자로서 아주 광범위하게 되어 사람들이 자기들 자신과 결혼할 수 있게 하는 결혼에 관한 법에 대하여 투표를 할 것인가요?

20:00 C: 아니, 제 말은요, 그것은 그런 것과 같은 일이 생기지는 않을 같은데
하지만 원칙으로써요.
C: 네, 원칙적으로?
네.
C: 물론이요. 만약 어떤 사람이 자기 자신과 결혼하고 싶다면 저는 그 사람을 중지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국가가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 협의할 것인가요? 결혼이여 안녕.
C: 물론이요.
우리가 여기에 있는 도중에 합의의 일부다처제 결혼에 대해서는요?
C: 저는 사실 남자와 여자가, 만약 부인과 남편들 또는 남편과 부인들이던지 동의가 있다면 허용될 수 있다고 봅니다.
다른 사람은요? 저는 많은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네, 여기 아래에요. 일어서서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세요.
D: 저는 빅토리아입니다.
빅토리아씨.
D: 지금 우리는 결혼에 대한 목적론적 논거를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에는 문제가 우리는 천주교의 입장 안에서만 말하고 있는데 목적론적 또는 결혼의 목적은 다른 종교 또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아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부는 그 국가 모두가 천주교라는 논거에 대한 강요할 수 있는 권리가 없습니다. 제가 갖고 있는 문제는 동성간의 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것에 있습니다. 당신의 믿음은 당신의 것입니다. 그것은 괜찮습니다. 하지만 합법적 동성 결혼은 카톨릭의 교회 안에 있는 것에 해당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국가는 누구나 원하든 간에 합법적 동성 결혼을 인정해야 합니다. 국가는 특정의 소수 또는 다수나 어떠한 사람이던 간에 어떤 한 종교에 의하여 그 국가 안에서 강요할 권리가 없습니다.
알겠습니다. 빅토리아씨, 좋습니다. 질문 하나가 있습니다. 당신은 국가가 동성간의 결혼을 인정해야 하는지 아니면 단지 결혼에 부족한 합법적 동성 결혼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입니까?
D: 제가 생각하기로는, 국가는 교회에 의하여 한 결혼이라고 인정할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그곳은 그들의 자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합법적 동성 결혼에 대하여는 저는 합법적 동성 결혼을 똑같다고 보는데요, 그렇지만 어떠한 종교에 있지 않다고 봅니다. 그렇기에 국가는 합법적 동성 결혼을 인정해야 합니다.
네, 알겠습니다. 빅토리아씨의 주장은 국가는 결혼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결정하는 것을 시도하지 않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오로지 종교적 공공단체에 의해서만 결정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다른 사람은요?
E: 제 의견은 왜 조금이라도 국가가 결혼을 인정해야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저 투표, 국가가 어떠한 결혼을 인정하면 안 된다고 한 사람들 중 한 명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남자와 여자 또는 두 남자 아니면 두 여자들의 조합이던 간에 제 자신을 결합시키기 위해서 국가에게 허락을 받기 위해 요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인데요, 만약 국가가 이러한 결혼을 인정하게 된다면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구속력이 있는 영향을 줄 것이나 제 생각으로는 현실에서는 구속력이 있지 않습니다.
네,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세요.
E: 쎄잔입니다.
그럼, 빅토리아씨가 말한 것과는 쎄잔씨의 의견은 초기부분의 토론과는 다르다고 합니다. 그들은 국가는 어떠한 결혼에 대한 목적에 또는 사람의 성적 특질에 대해 그것을 명예롭게 하는 것 또는 인정하는 것 아니면 단언하는 것에 대하여 아무런 연관이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쎄잔씨는 그렇기에 국가는 결혼에 대해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완전히 벗어나야 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 중의 한 명입니다. 여기에 질문이 있습니다. 어떠한 국가가 어떠한 형태의 결혼에 대해 인정을 하지 않는다는 쎄잔씨의 입장을 적용하지 않는다면 어떤 도덕이나 종교의 입장에서 있지 않고 적절한 목적에 의하여 동성간의 결혼 그리고 사이에서 질문의 결정을 하는 것이 가능한 건가요? 여기에 참여해주신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질문을 다음 시간에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주 잘하였습니다.

우리는 답해야 할 두 가지의 질문이 남아있습니다. 첫 번째는 좋은 삶에 대한 질문을 하면서 정의를 생각하는 것에 대해 필요한가요? 또는 피하기 어려운가요? 맞습니까? 그리고 정의를 추론하는 것이 가능한가요? 네, 제가 생각하기로는요. 제가 그것들의 답변을 두 가지의 질문으로 만들어보도록 시도해 보겠습니다. 자, 이것들의 질문을 하기 위해서 우리는 저번 시간에 동성간의 결혼에 대하여 토론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결혼의 기반 또는 목적에 대하여 동성간의 결혼을 반대하는 자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들은 적어도 어떠한 부분에서는 생식이 있어야 한다고 합니다. 아이들을 낳고 키우는 것이요. 그리고 동성간의 결혼을 변호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결혼에 대한 목적 또는 목적인에 대해서 논쟁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쌍의 사람들이 생식을 하던지 또는 하고 싶어하는 이성애자적 결혼과 같은 조건으로 우리가 필요로 하고 있지 않다고 합니다. 우리는 불임인 한 쌍의 남녀를 결혼하는 것을 허락하고 그리고 이것은 한나씨가 마크씨와 같이 한 교환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여기에는 또 다른 입장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우리의 토론의 마지막 부분에서 빅토리아씨가 주장을 하였습니다. 그녀는 우리는 이 질문에 대하여 결정하려는 시도를 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적어도 국가의 수준에서 그리고 법의 수준에서 그러한 좋은 것에 대한 질문에 대해 어떠한 합의점을 도달하려고 하면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러 직업을 겸한 사람이 있는 곳에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곳은 사람들의 도덕과 종교의 신념이 모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법과 권리의 틀을 이러한 경쟁적인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인 입장들을 존중하는 중립적인 위치에서 만드는 것을 시도해야 합니다. 그럼 이것은 흥미로운데, 중립의 아이디어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 특정의 다른 사람들은 결혼을 남자와 여자 사이에서 한다는 제한을 두는 것에 찬성하지 않는 입장에서 논쟁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동성간의 결혼에 대해서도 찬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중립의 이름으로 세 번째의 가능성을 주장합니다. 그것은 정부가 어떠한 결혼에도 간섭하지 않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 번째의 가능성입니다.

자, 안드리아 메리 로즈씨는 그녀는 이 토론에 아주 흥미로운 입장을 제공하였는데요, 그녀는 중립을 요구하는 사람들과 다시 함께 하였습니다. 안드리아씨는 어디 있죠? 안드리아씨, 당신은 우리에게 당신의 입장을 함께 나누는 것을 해주 것입니까? 먼저 당신에게 마이크가 가게 된다면요. 우리에게 당신의 의견을 함께 나눠주세요. 당신은 왜 국가가 도덕과 종교까지 그리고 동성간의 결혼 문제까지에 대해 중립이 되는 것을 시도하는 것이 실수라고 생각합니까?
F: 저는 그것이 가능한지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삶은 그들이 어떻게 세상을 바라보는지에 따라 완전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마 아리스토텔레스와 동의하는 것인데, 그것은 국가의 역할은 그 사람들을 도와주는 것에 있고 무엇이 옳지 않고 무엇인 옳은 지에 대한 공동체에 대해서 이해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능한가요, 이것은 우리가 동성간의 결혼에 대해 계속 질문해온 낙태에 관해서도 같은 질문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은 낙태가 어떠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 또는 어떠한 결정을 하지 않은 체 허용되어야 하는지 또는 금지되어야 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낙태에 대한 어떠한 도덕적인 원리를 따져보기 전에요?
F: 아니요.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논란이 많은 이유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태아가 생명으로 여겨야 하는지 그렇지 않은지에 대하여 그들의 본질적인 믿음에 대하여 깊이 헌신적이게 됩니다. 그렇기에 제가 만약 태아가 살아있는 생명이라고 여기고 태아에게도 권리가 있으며 살 수 있는 본질적인 권리가 있다고 여긴다면 저는 말하기가 매우 어려울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을 제쳐놓고 당신이 원하는 데로 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는 내 믿음대로 살 것이고 다른 말로 당신은 마음대로 해도 되지만 나에게는 그것은 살인으로 됩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냥.
동성간의 결혼의 케이스에서의 유사점은 당신은 당신이 동성간의 결혼에 대해 옹호하는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F: 네.
하지만 당신은 그 입장을 취하게 된 것이 당신이 그 바탕이 되는 도덕적인 질문에 의해서 설득된 후인 것이죠?
F: 네, 맞습니다. 제가 생각하기로는 특별히 미국에는 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그들의 종교적인 믿음으로 살아갑니다. 다른 날처럼 마크씨는 자기가 기독교, 가톨릭교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많은 생각과 많은 기도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대화를 통하여 제 자신을 위하여 결정을 하여야 했습니다.
30:00 그리고 저는 가톨릭의 동성애자는 죄악이라는 입장과는 동의하지 않는다고 결정하였습니다. 그리고 제가 그러한 저의 신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 결정을 내리게 된 후, 이게 이상하게 들리죠? 오, 종교적으로요?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이고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그들의 믿음과 의견을 갖고 오는 곳입니다. 그리고 거기서 저는 이렇게 말합니다. 저는 이러한 상태에 도달하였습니다. “나는 동성간의 결혼에 대해서 좋아,”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은 제가 그것에 대해 괜찮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것이 도덕적으로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좋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누가 답변하고, 만약 당신이 거기에 잠시 있을 수 있다면요, 누가 안드리아씨의 생각에 대하여 답변하겠습니까? 동성간의 결혼에 대한 질문을 답변하기 위해서는 동성애자의 도덕적인 상태와 결혼의 목적 또는 존재이유를 알아야 한다는 질문에 대해 정리를 해야 하는 것이 필수적이라는 의견입니다. 여기에 누가 이 주장에 대해 안드리아씨의 의견과 동의하지 않습니까? 네.
G: 저는 당연히 당신의 도덕적인 의견과 당신이 법은 어떻게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생각을 구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저는 낙태는 절대적으로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낙태를 불법으로 한다고 해서 이것은 없어질 문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낙태를 불법으로 해서 이것을 멈추게 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임신 중절 합법화 지지자입니다. 그리고 저는 여자에게 그들의 안전을 위해 선택권이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이것과 같이 도덕적으로 남자에게 결혼하고 싶지 않지만 저는 직접 그들이 법을 원하는 데로 하기 위해서 한다고 하여 다른 사람들의 자유 침해하는 것을 시도하는 것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안드리아씨?
F: 법이 어떠한 것을 합법 또는 불법으로 만든다든지 그것은 맹목적으로 어떠한 것을 허용하든지 허용하지 않든가 입니다. 만약 당신이 낙태가 합법이라고 만든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괜찮다고 할 것입니다. 그것은 사회, 공동체에서 태아를 낙태하는 것은 우리 사회 내에서의 우리에게는 괜찮다는 뜻입니다. 만약 우리가 합법적으로 만든다면, 만약 우리가 불법으로 만든다면 우리는 하나의 공동체적 사회로써 그것은 괜찮은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리고, 그리고 하기 전에 당신의 이름을 말해주세요.
G: 제 이름은 대이니얼입니다.
대이니얼씨, 뭐라고 말할 것입니까?
G: 우리는 공동체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옳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는 것인가요? 아니면 공동체적으로 그대로 낙태를 하려고 산부인과에 가려는 여자들을 원하지 않기에 그들이 골목길에 있는 곳에서 안전하지 않은 상태에 하도록 내버려두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요?
알겠습니다. 이것을 동성간의 케이스로 돌려오게 해주세요. 대이니얼씨, 왜 당신은 동성간의 결혼에 대해 합법적으로 허용되는 것을 반대에 대해 당신이 더 좋아하는 입장이 된 그 결정을 해야 하나요?
G: 저는 완전히 합법적으로 허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제가 남자와 결혼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저는 법적으로 성관계를 동의할 수 있는 두 명의 남자가 가서 결혼을 하는 것에 왜 안 되는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것을 어떻게 반대하는지 모르겠습니다.
알겠습니다. 어떠한 해가 되지 않습니다.
G: 네, 어떠한 해가 되지 않습니다. 어느 쪽으로 하든지 말입니다. 그것이 저에게 도덕적으로 옳지 않다고 해도요.
알겠습니다. 제가 방향을 이 동성간의 결혼에 대하여 경계표를 만든 매사추사스 법원으로 돌리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안드리아씨와 대이니얼씨가 여기서 토론한 쟁점에 대한 것입니다. 두분 모두에게 감사드립니다. 매우 고맙습니다. 법원이 뭐라고 말하였을까요? 이것은 굿리치의 케이스인데, 이는 메사추사스 주가 결혼의 범위를 동성간의 커플들에게도 확장하도록 하는 요구였습니다. 법원은 이렇게 시작하였습니다. 그런데 법원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이 그 의견을 잘 읽어보면 법원은 갈등이 있었는데 우리가 지금 들었던 안드리아씨와 댄씨가 변호한 것과 같은 두 가지의 입장으로 나누어져 있었습니다. 법원은 이렇게 시작하였는데요, 이것은 마가레트 말샬 연방 대법원장의 의견입니다. 자유로운 중립으로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도덕적, 그리고 윤리적인 신념에 대해 결혼은 오로지 한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하며 동성애를 하는 행동은 부도덕하다는 것이라고 아주 뿌리 깊게 고수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종교적, 도덕적, 윤리적인 신념에 대해 동성의 커플들은 결혼할 권리가 있다고 똑같게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동성애를 하는 사람들은 그들의 이성애자 이웃들과 똑같이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한다. 어떠한 입장도 우리보다 먼저 이 질문을 대답하지는 못한다. 무엇이 위기에 처했는가는 법에 의하여 개인들의 자치와 평등이 존중되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 위태로운 것은 개인은 하나밖에 없는 헌신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을 자유롭게 선택하는 것이다.” 다른 말로는 선택의 도덕적인 가치의 쟁점이 아니라 개인이 그 선택을 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자유로운 중립적인 오도 가도 못하는 법원의 의견입니다. 자치와 동의를 강조하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법원을 깨닫는 것처럼 보입니다.
35:00 법원은 동성간의 결혼을 인정하는 자유로운 케이스 그리고 중립적인 케이스는 성공하지 못하며 그 위치에까지 보내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오로지 개인의 자치에 대한 존중이라면 만약 정부가 자발적인 친밀한 관계에 대해 진실로 중립적이라고 한다고 하게 된다면 그들은 다른 정책을 채택하여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 다른 정책은 다른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어떠한 연합이나 어떠한 종류의 조합으로부터의 인정으로 정부와 국가를 다 함께 제거한다는 것입니다. 만약 정부가 정말로 중립적이게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여기서 마이클 킨슬리의 기사에 대하여 변호하였던 세 번째의 입장이라고 설명하였던 일관된 위치를 정하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 입장은 이것은 적어도 사회가 기능하는 데에 있어서 결혼을 폐지하자는 것이었는데 이것의 더 나은 표현은 종교의 설립이고 이것을 주장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킨슬리의 제안이죠. 그는 동성간의 결혼의 반대의 이유는 그것은 중립적인 관용을 넘어선다고 지적합니다. 그리고 정부가 동성간의 결혼을 허락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 논쟁의 핵심입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의 표현의 의해서면 사회적인 인식인 지위와 명예에 대한 적적한 배분이 여기서의 쟁점이라는 것이지요. 동성간의 결혼은 자유로운 중립적인 기반 또는 차별 없는 것 또는 자치에 대하여 정당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반 대중의 토론의 위태로운 문제는 동성간의 결합이 가치가 있는지 또는 명예로 인정될 수 있는 가치가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결혼이라는 사회 제도의 목적에 적당한지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킨슬리는 당신이 중립적이고 싶다면 “교회와 다른 종교적 시설들이 결혼식을 제공할 것을 허용,”하라고 말합니다. “백화점과 카지노에서도 그들이 원한다면 한몫 끼게 합시다,” 이것이 킨슬리가 말한 것입니다. “커플들에게 그들의 결합을 그들이 선택하는 데로 나두고 그들이 원하는 때에 그들 자신들이 결혼할 수 있고 그렇게 고려하게끔 하여야 한다. 그리고 만약 세 명의 사람들이 결혼을 하고 싶다면 또는 만약 한 사람이 그 자신 또는 그녀 자신을 결혼하고 싶어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이 그들을 위해 의식을 거행하고 그들을 결혼하였다고 선언하고 싶다면 그렇게 하게 내버려두어라. 만약 당신과 당신의 정부가 연루되지 않았다면 당신은 무슨 상관입니까?” 이것이 킨슬리입니다. 하지만 이것은 메사추사츠 주의 대법원이 원했던 입장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폐지를 부르지도 않았고 결혼의 폐지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법원은 그러한 쟁점에 대한 다른 것에 대한 사회의 인정 정부의 역할에 대해 질문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과 반대로 법원은 결혼을 “우리에게 가장 보상적이고 소중히 하는 제도”라고 능변 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 나아가서 동성의 상대도 포함되게 결혼의 정의를 확장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그들은 결혼은 개인의 선택을 관용하는 것의 문제의 이상이라고 인정합니다. 그리고 사회적 인정과 명예에 관한 문제라고 합니다. 말샬 판사는 “진실의 의미에 의해서는 모든 민법상의 결혼은 세 가지의 조합원이 있어야 한다. 기꺼이 하려는 두 명의 배우자와 그리고 승인하는 국가 하나가 있어야 한다. 민법상의 결혼은 아주 깊은 개인적인 약속임이 동시에 상호관계, 동무로서 사귀는 것, 친밀함, 충성적, 그리고 가족에 대한 높은 대중의 경축 행사의 이상이기도 하다.“라고 썼습니다. 이것이 법원의 입장입니다. 이것은 자유로운 중립에서보다 훨씬 더 나아간 것입니다. 이것은 결혼을 명예로운 것으로 대중의 인정을 받는 종류로 축하하며 확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법원은 결혼의 목적이 무엇이라는 이 토론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낸 것입니다. 마샬 판사의 의견은 고려하고 결혼의 근본적인 목적은 생식을 위해서라는 이 개념을 거부합니다.

그녀는 신청자들에게는 결혼의 자격 어떠한 요구 사항을 만족시키기 위해 이성애자들은 그들의 능력을 또는 그들의 결혼을 하기 위해 아니면 아이를 갖기 위해서의 의도가 증명해야 된다고 지적합니다. 수정능력은 결혼의 조건이 아닙니다. 그들의 죽음의 자리에서 나오지 못하는 사람도 결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온갖 종류의 논쟁을 제기하고 우리가 저번 시간에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결혼의 적절한 존재이유와 본질적인 성질, 즉 목적이 무엇인가 입니다. 그리고 그녀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40:00 “결혼의 본질적인 것과 목적은 생식이 아니라 서로 상대에게 유일하고 영구적인 약속을 하는 것이다.” 제가 이 법원의 의견에 대해 어떠한 말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동성간의 결혼에 찬성이가 또는 반대인가의 논쟁이 아니라 당신은 바탕이 되는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 물음에 중립적인 상태로 있으면서 동성간의 결혼에 호의를 보이던지 반대하는 가의 주장의 논쟁입니다. 그렇기에 이 모든 것은 적어도 우리가 우리의 사회에 갖고 있는 정의와 권리에 대한 열렬히 논쟁하는 토론들은 어느 정도는 중립적이기 위한 시도 그리고 동의, 선택, 자치의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시도이며 우리는 성공하지 않는 어떠한 입장에 서지 않는다는 것을 제안하기 위해서 입니다. 이러한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논쟁들에서 중립적이고 싶어하는 법원조차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냅니다. 그러면 우리의 두 번째 질문에 대해서는 어떠한가요? 만약 정의와 옳음에 대한 토론에서 좋은 것에 대해 추론을 하는 것이 피할 수 없다면 만약 좋은 것에 대해 추론을 한다는 뜻이 당신이 좋은 삶을 살기 위해서 오로지 한 개의 원리, 규칙, 격언, 또는 하나의 기준만 갖고 있어야 한다면 당신이 도덕에 관하여 어떠한 의견 차이가 있을 때마다 단순히 이 규정들에 들어가서 해결을 본다고 한다고 하면 과연 그것이 가능한가요? 그 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 하나의 원리 또는 규칙을 갖고 있는 것은 좋은 삶 또는 정의에 대한 추론의 유일한 방법이 아니고 가장 좋은 방법도 아닙니다. 돌아가서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정의와 권리 그리고 때로는 좋은 삶에 대하여 여기서 했던 논쟁들에 대해서 돌아가서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그러한 논쟁들이 진행되었는지에 대해서요. 그것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안한 특정한 것, 특정한 케이스, 뉴스, 이야기들의 물음에 대해 우리의 판단 사이에서 전후로 움직여보면 매우 같은 방법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특정한 케이스들에 관한 우리의 판단을 전후로 움직여보고 우리가 특정한 케이스들에서 선택하는 입장에 대하여 우리의 이유들에 적절한 더 보편적인 원리를 적용하였습니다.

도덕적인 추론을 하는 이 변증적인 방법은 플라톤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대인 고대로 돌아가지만 거기서 멈추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의 또는 변증적인 도덕 추론에 대하여 하나의 견해가 있기 때문이죠. 그것은 존 롤즈에 의하여 시행 중에 있던 큰 명쾌함으로 방어하였습니다. 정의의 이론에 대하여 정당화하는 그의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여러분들은 기억하듯이 롤즈가 논쟁을 펴는 것이 단순히 무지의 베일과 원리들만이 아니라 정의에 관한 추론에 대한 도덕적인 추론의 방법인데 그는 반사적 균형이라고 부릅니다. 반사적 균형의 방법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특정한 케이스들에 대한 판단을 고려하는 것과 그러한 판단들을 이치에 닿기 위해서 우리가 확실히 구별할 수 있는 보편적인 원리에 대해 이 둘 사이의 전후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단순히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닌데 그 이유는 우리의 처음의 직감이 옳지 않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거기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것들을 해결해 낸 후 그 특정한 판단을 때로는 원리에 비추어서 수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때로 우리는 원리들을 수정하고 때로 우리는 특정한 케이스들에 대하여 우리의 판단과 직감을 수정하기도 합니다. 총체적인 요점은 롤즈의 말을 인용하여 말하겠습니다. “정의의 개념은 자명한 전제로 추론될 수 없다. 그것의 정당화는 서로의 지지로 많은 고려를 통하여 모든 것이 함께 하나의 시종일관한 의견으로 들어맞는 것이다.” 그리고 그 후의 정의의 이론에 대하여 그는 이렇게 썼습니다. “도덕의 철학은 소크라테스의 것입니다. 그들의 규제적인 원리들이 밝혀진 후에는 우리는 우리의 현재 고려하는 판단들을 바꾸고 싶을 것이다.”

45:00 그럼, 롤즈가 이 아이디어를 받아들인다면 평등한 자유론 자에 대하여 계속 제안한다면 우리에게 남겨진 물음은 그는 정의에 대하여 질문을 적용하는데 그는 도덕과 좋은 삶에 관한 물음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가 옳은 것을 좋은 것보다 우선하는 지에 왜 계속 충실한 지에 대한 이유가 됩니다. 그는 평등한 자유론 자의 방법은 정의와 옳음에 대하여 함께 나눈 판단을 발생시킬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는 좋은 삶에 대하여 그가 포괄적인 도덕적이고 종교적인 문제라고 부르는 것은 그것들이 함께 나눈 판단을 발생시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는 근대의 사회들은 좋은 것에 대한 다원적인 이유가 있다는 사실이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유를 잘 말하는 양심적인 사람이더라도 그들은 좋은 삶, 도덕, 그리고 종교에 대한 물음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 다는 것을 알아낼 것입니다. 그리고 롤즈는 그것에 대해 맞을 것 같습니다. 그는 다원적인 사회에서의 대한 동의하지 않는 사실에 대해서 말하는 게 아니라 그는 좋은 삶, 도덕, 그리고 종교에 대한 질문을 계속 한다고 또한 제안을 합니다. 하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는 정의에 대해서는 같을 수 없다고 한 그의 더 나아간 주장을 원하는 것입니까? 그렇다면 우리가 다원적인 사회에서의 정의에 대해 동의하지 않는다는 문제의 사실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적어도 그것들의 몇 개의 의견 차이들은 분별 있는 불일치가 된다는 것 또한 사실 아닙니까? 그것은 어떤 사람은 자유주의론 자의 정의 이론에 호의를 보이고 다른 사람들은 평등주의론 자들의 정의 이론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방법으로요. 그들은 논쟁을 벌입니다. 우리의 사회는 다원적이며 자유시장과 방임주의의 자유론 자에 의한 정의 그리고 더 많은 평등주의자들 사이에서 마찬가지로요.
여기에서 도덕적 추론과 우리가 정의에 대하여 논의할 때 나오는 의견차이의 사이에 다른 원리가 있는 것인가요? 그리고 언론의 자유에 대한 뜻 그리고 종교적 자유의 본질에 관한 것에 대해서요. 법 피지정인부터 대법원까지 우리가 가졌던 토론들을 돌아봐 보세요. 이 모든 것들은 정의와 옳음에 대한 의견 차이였습니다. 과연 분별 있는 다원적인 사실에서 정의와 옳음에 대한 케이스와 도덕, 종교, 그리고 원리에 관한 케이스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저는 그것에 차이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두 케이스 모두 우리가 의견 차이가 있을 때 하는 것은 우리가 여기서 한 학기 동안 하였던 것과 같이 대화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하면 됩니다. 우리는 특정한 케이스들에 의하여 자극되어 나온 주장들을 고려하였고 우리는 한쪽 방향보다는 다른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수 있는 추론의 방법을 개발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후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이유들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우리의 입장을 수정하도록 설득이 되었고 다른 때에는 우리의 입장을 줄이던지 늘리게 하도록 도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정의에 대해서 도덕적인 추론이 진행되는 방법입니다. 그렇기에 저에게도 좋은 삶에 대한 물음에 대해 이렇게 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직 더 먼 걱정이 남아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유주의의 걱정입니다. 만약 우리가 도덕과 종교에 대하여 정의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우리의 의견차이들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고 한다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우리랑 동의하지 않는 같은 시민들에 대하여 존중을 하게 하는 사회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은 한 사람이 존중의 어떤 개념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유주의자의 개념에서는 우리와 같은 시민들의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인 신념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말하자면 정치적인 목적으로는 그들을 무시하면 된다고 합니다. 그러한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인 신념의 위에 솟아 있던지 유보해 두기 위해 또는 발췌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방해 받지 않도록 놔두면 된다고 합니다. 그들의 언급 없이 우리의 정치적 토론을 진행해 나가면 됩니다. 하지만 이것이 유일한 방법이 아닙니다. 아니면 이것은 아마 민주주의적 삶이 좌우되는 상호의 존중을 이해하는 것을 위한 가장 그럴듯한 방법도 아닐 것입니다. 어떠한 다른 존중의 개념이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와 같은 시민들의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인 신념을 존중하기 위해서는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 말에 귀를 기울이는 것과 같이 그들과 함께 관계를 가지면 됩니다.

50:00 때로는 그들을 능력을 시험하던지 경쟁을 하게 할 수도 있으며 때로는 그들의 말을 듣고 그것들을 배우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인 주목과 관계의 정치를 통하여 어떠한 주어진 케이스에 대해 동의를 하게끔 인도하게 된다는 어떠한 보장도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들에게 다른 사람의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인 신념에 대해 감사를 받게 해줄 것이라는 보장 또한 없습니다. 어쨌든 종교적 또는 도덕적 정설에 대해 더 많이 배우게 되면 우리가 덜 좋아하게 만들어줄 가능성은 항상 있습니다. 하지만 심의와 연대성의 존중은 다원적인 사회에 더 적합하며 적절하고 이상적이라고 보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도덕적 그리고 종교적인 의견 차이가 반영된 최후적인 대다수의 인간의 좋은 것들 그리고 도덕적인 연대성에 관한 정치에 대해서의 정도까지 우리를 더 할 수 있게 만들기에 제 생각으로는 그것을 감사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좋은 것에 대하여 구별이 있는 이유는 다른 삶들에 의하여 표현되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우리가 한 13주 정도 전에 제일 처음 만났을 때, 저는 정치 철학에 대한 유쾌한 기분이 있고 그리고 위험성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철학이 실행되는 원리는 그리고 항상 실행되는 방법은 우리에게 친숙한 것들을 낯설게 그리고 불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변하기 쉬운 추정을 말합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친숙함이 낯선 것으로 바뀌기 시작하고 우리가 우리의 상황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해 본다면 다시는 그 전처럼 같아질 수 없을 것이라고 경고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지금쯤 이 불안에 대하여 조금이더라도 경험을 하였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긴장은 비판적인 의견에 생명을 불어넣어주며 정치적인 발전 그리고 도덕적인 삶에도 또한 그렇게 될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토론들은 한편으로는 끝에 도달하였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계속 이어갑니다. 처음에 우리는 “왜?”라고 물었습니다. “왜 이러한 주장들은 계속 이어갑니까?” 아무리 최후에도 해결될 수 없는 불가능한 물음을 제기하더라도 그 이유는 우리는 항상 이러한 물음들 속에서 어떠한 답변을 갖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공적인 삶과 사적 삶에서 때로는 불가능할 것만 같다고 하여도 철학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처음 칸트의 입장에서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것은 회의론은 인류의 존재이유에 있어서 흥미로운 위치에 있고 그것은 독단적인 이상히 여기는 것으로 반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곳은 영구적인 정착을 위한 거처가 아닙니다. 우리를 단순히 묵인과 회의 또는 안주하도록 허용하게 된다면 칸트는 “참지 못하는 이유를 극복하기 위하여 절대로 싸우지 않는다”라고 썼습니다. 이 수업의 목적은 참지 못하는 이유를 깨우기 위해서였고 그리고 그것이 어떻게 나아가는지 보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 정도까지만이라도 하였고 그 참지 못하는 이유가 여러분들을 자극하였다면 앞으로 올 날들과 여러 해들을 생각해 본다면 우리는 결코 적지 않은 것을 이루었습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매우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강의정보

강의자
Michael Sandel
제공자
Harvard
태그
Justice, What is the right thing to do?, Michael Sandel, Harvard, Political Philosophy, 정의,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하버드, 정치철학
저작권
저작자표시-비영리-동일조건변경허락
출처
http://www.academicearth.org/lect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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